산탔음

한라산 등반 후기:나는 악성 등산가가 아니다 저 산이 악성 등산로다

좋와 2025. 10. 26. 00:30

한번씩 편집증적으로 버킷리스트를 달성하고자 하는데 그게 한라산 등반이었다.

 

정신없이 일하다 다가온 황금연휴에 꽉차버린 탐방로 예약을 보며, 

그럼 나는 언제 한라산을 오를수 있냐고 절망하며 이번주 토요일 성판악 등산예약을 켰는데

새벽 5시 타임에 딱 1자리가 생겼다.

타임세일 같은 기분으로 바로 예약을 하고 반차를 쓰고 비행기를 예약해버렸다.

관음사 코스로는 정상에서 하산도 등산도 안됨

 

일주일 내내 한라산만 생각하며 일하고 금요일에 점심만 먹고 후딱 퇴근했다.

 

어짜피 한라산 등반이 목적이라 숙소도 한라산 등산을 위한 숙소로 정해서 비행기도 늦은 비행기를 탔다.

제주에 도착하니 8시 넘었고, 숙소에 도착하니 9시였다.

숙소는 늦은시간도 체크인이 가능해서 다행이었다.

 

오르다 게하에서 숙박했는데, 등산장비도 대여 해주고 샤워도 가능했다. 조식도줌.

 

숙소 앞 국밥집에서 대충 저녁을 때우고 씻고 누우니 4시간 뒤에는 일어나야 하는 상황이다.

 

눈이 안떠질 것 같았지만 불침번 선 사람처럼 일어나졌다.

밖에는 비가 약하게 오고 있었다.

금요일인데도 사람이 많아  숙소에서 제공하는 한라산 셔틀은 4시반 타임, 5시반 타임으로

나눠서 이동해야했고 4시반을 선택했는데, 한라산에 도착하니 5시반이었다.

 

근데 해가 안떳다!! 아직도 여름인줄 아는 멍청이가 여기 있음.

 

입구에서 본인확인하고 어떡하지 하며 멍때리고 있는데, 5명인데 랜턴을 3개나 가진 팀이 지나가길래 거기 꼬리에 붙었다.

죽기 살기로 따라가다보니 6시 넘어서 어슴푸레 시야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2시간을 오르니 속밭대피소가 보인다.

 

대피소 안에서 한참 멍때리다 일하기 싫은 노새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는 좀 더 강해졌다. 숲이 울창해 직접적으로 비를 맞진 않지만 나무에 맺히 굵은 빗방울이 우비를 때리고

모자챙 끝에는 처마처럼 가는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빌린 등산화는 아직 습기가 침투하지 않았다.

 

속밭에서 한시간을 더 올라 사라오름 갈림길 도착했다.

휴게공간이 있길 바랬지만 그저 갈림길일 뿐 화장실도 쉴 곳은 없었다.

갈림길을 지나니 나무가 낮아져서 비를 그대로 맞아야 했다. 비는 쉬지않고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시간을 또 더 올라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나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는 사람이 서있었다.

빈자리가 없어 몇분 기다렸다 앉았다. 우비를 벗으니 땀으로 젖은 몸에 한기가 돌았다.

바람막이를 꺼내 입고 가져온 커피와 빵을 먹었는데, 커피는 좋은 음료가 아니다...

올라갈때는 카페인 덕분에 힘이 났지만...내려올 때 화장실이 급해서 혼났다...

사진찍는다고 기다린 시간까지 포함해서 다시 진달래 대피소로 돌아오는데 4시간이 걸렸다.

 

아무튼 그렇게 간식을 먹으며 막간의 휴식을 즐기고 있는데, 호우주의보가 발령될 예정이니

올라갈 사람은 올라가고 아님 내려가라는 방송이 나왔다.(물론 이렇게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진 않았다.)

밖으로 나가니 비는 말도 안되게 내리고 있었다.

난 당연히 내려가야지 하고 나왔는데, 모든 사람이 오른쪽으로 향했다. 진짜 모든사람이...

미친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나도 오른쪽으로 향했다...사실 그때 왼쪽으로 갔어야 했다...

 

정상으로 오르는 내내 퍼붓던 비는 어느 순간 운무로 바뀌며 그쳤다.

그동안 차갑고 습한 구름을 헤치고 지나갔다. 가끔 개긴 했지만 한순간이고,

물방울 입자가 보이는 공기를 뚫고 정상 계단과 바위를 올랐다.

 

잠깐 날씨가 좋아져서 사진 남겼는데, 이게 마지막이었음

 

올라가던 행렬은 한라산 정상석 사진줄끝에 자연스럽게 멈춰섰다.

적당히 찍고 내려가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물론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다.)

줄 끝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지나가는 구름과 사냥하는 족제비를 구경하고 날벌레를 쫓아내며 한기와 싸우고 있었다.

 

날씨 진짜 개끔찍하다

 

사진을 찍을때까지 개지 않는 백록담을 뒤로하고 하산했다.

역시나 구름 아래로 내려가자 비가 또 말도 안되게 내렸다...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하니 도저히 내려갈 체력이 없었다.

약간 공황상태가 왔다. 여기서부터 어떻게 내려갈지 모르겠고 나가기 싫었다.

비는 계속내리고, 신발은 이미 물로 가득찼고, 고어텍스 바지는 비로 젖어서 무거워 졌다.

그래도 집에 너무 가고 싶었다.

내려가는 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 갔다. 까마귀만 나와 보폭을 맞춰 이동했다.

다들 나와 같은 피와살인데 어떻게 그렇게 움직이는지 사람같아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할일은 그냥 오른발 옮기고 왼발을 옮기는 거였다.

오로지 집에가겠다는 의지로 움직여서 내려왔다.

점점 안내하는 시간보다 배의 시간이 다음 이정표까지 가는데 소요됐다.

핸드폰은 꺼졌지만, 온몸이 젖어 보조 배터리를 꼽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다행이 손목의 핏2의 불빛이 아직 내가 아는 세상이랑 이어져 있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비는 성판악 입구를 나올때까지 쉬지않고 내렸다.

안내소로 들어가니 따라오던 까마귀도 날라가 버렸다.

 

탐방로 안내소에 앉아서 택시 부르고,

숙소도 전화해 잠깐 쉬었다 가려고 하는데 예약되냐고 하니 1박보다는 조금 저렴하게 예약을 잡아줬다.

숙소에 가자마자 씻고 비에 젖은 옷 비닐봉지에 대충 때려 넣고 침대에 누워서 비행기 시간까지 천장을 보고 있었다.

PTSD가 온 건지 피곤하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천장보다 뱅기타고 집에 갔다.

모바일로 pdf로 다운 받았음. 종이로 받았음 불태웠을듯.
중간에 핸드폰 꺼진 시간은 기록되지도 않았다. 총 11시간을 이동했는데...
올라갈때는 비가 왔지만 안내판에 나오는 시간과 페이스가 같았다. 하지만 내려갈땐 아니었다.

 

올라가는 시간 4시간반 내려오는 시간 6시간반 총 11시간 성판악 왕복은

무릎보호대 모양 물집자국과 보라색 발톱, 이틀간의 몸살과, 일주일동안의 근육통을 남겨주었다.

사실 이 후기는 올리려고 하지 않았다. 쓰는 지금도 너무 고통이라...

그런데 나같은 다른 사람이 무모한 도전을 하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돌이키지 못한 순간을 돌이킬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후기를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블로그, 쇼츠에 속아 내려오는 모습은 영상에 올라오지 않는가 라는 의문을 품지 않는

과거의 평행우주 속의 나에게 이 글을 보낸다.

 

만약 9-6에 회사-집인 직장인이 한라산을 올라간다고 한다면 아래와 같이 말할 것 같음.

 

1.랜턴을 가져갈 것(등산스틱은 신체의 일부임)

2.비오는날 산을 오르지말것

3.올라갔으면 내려와야한다는 것을 기억할 것

4.가방을 최대한 가볍게 쌀 것

5.한라산을 오르지 말 것